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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

일상폭스 2022. 1. 2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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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인조 8) 3월에 인경궁(仁慶宮)에서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이자 대왕대비인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에게 올린 연향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존 연향 관련 의궤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일본이다. 경오년(庚午年: 1630) 진풍정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신해년(辛亥年: 광해군 3년, 1611)과 갑자년(甲子年: 인조 2년, 1624) 진풍정에 대한 내용이 부록으로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인목왕후는 본관이 연안(延安)이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신해년 진풍정은 1610년(광해 2)에 선조를 부묘(祔廟)한 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위로하고자 1611년(광해 3) 11월에 창경궁(昌慶宮) 통명전(通明殿)에서 올린 연향이다. 이 당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계모가 되나,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시킨 패륜을 빌미로 재위 15년 만에 쫓겨나고, 인조(仁祖)가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즉위하자 십수년 동안 고초를 겪은 인목왕후를 위로하는 연향을 베풀고자 했으나,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 영건으로 국고가 바닥났고, 반정공신의 논공행상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인조 2) 정월에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4년 10월에 경덕궁(慶德宮) 광명전(光明殿)에서 연향을 올렸으니, 이것이 갑자년 진풍정이다. 즉, 『풍정도감의궤(豐呈都監儀軌)』의 주내용인 경오년 진풍정과 부록으로 실린 신해년과 갑자년 진풍정의 주빈이 모두 인목왕후인 점이 공통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풍정도감의궤』 원문을 열람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원문에는 쪽수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홈페이지에서는 편의상 표지를 1쪽으로 하여 차례대로 순서를 매겨놓았다.
목차 없이 바로 의궤의 본문이 시작되며, 4쪽~17쪽까지는 소제목이 없지만, 전교(傳敎)·계사(啓辭)·감결(甘結)의 내용이 실려 있고, 18쪽 이후 46쪽까지는 의장수(儀仗數)·정재색(呈才色)·찬선색(饌膳色)·배설색(排設色)·진풍정의(進豐呈儀)가 실려 있는데, 이는 경오년(1630) 진풍정과 관련된 것들이다. 의장수에는 대비전에 필요한 의장의 종류와 수효, 정재색에는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정재 종목 및 준비과정, 찬선색에는 음식 마련, 배설색에는 상탁(牀卓)·주탁(酒卓)·상건(牀巾)·주렴(朱簾)·차일(遮日) 등을 배설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47쪽~56쪽의 진풍정의와 57쪽~64쪽의 왕대비전진풍정의(王大妃殿進豐呈儀)는 신해년(1611) 진풍정과 관련된 것인데, 의식이 온전히 실려 있어 다른 시기의 연향 의식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무런 소제목 없이 갑자년 9월 24일의 예조 계사로 시작되는 65쪽~72쪽의 기록과 73쪽~74쪽의 대왕대비전진풍정의(大王大妃殿進豐呈儀)는 갑자년(1624) 진풍정과 관련된 것이다. 73쪽~74쪽의 대왕대비전진풍정의가 일부만 실려 있는 이유는 1624년 연향을 기록한 『갑자년풍정등록(甲子年豐呈謄錄)』이 정묘호란(1627, 인조 5)때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4쪽에서 74쪽까지는 검은색 인찰선(印札線)이 그어져 있고, 74쪽에는 의궤의 마지막 장에 있는 제조(提調)와 낭청(郎廳)의 서명이 적혀 있으므로, 74쪽이 책의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붉은 인찰선이 그어져 있고 해서체(楷書體)로 단아하게 글씨를 쓴 두 쪽이 더 있다. 인찰선의 색으로 미루어 4~74쪽은 분상용(分上用)이고 75~76쪽은 어람용(御覽用)이다. 75쪽과 76쪽의 내용은 19쪽 제14행부터 22쪽 제5행까지의 내용과 완전히 똑같다. 처음 제작 당시부터 분상용과 어람용이 같이 제본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이는 훗날 다시 책을 제본하는 기회에, 다행히 남은 어람용 『풍정도감의궤』의 두 쪽을 분상용 의궤에 덧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정재색에는 1630년 진풍정에서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금척(金尺)·봉래의(鳳來儀)·연화대(蓮花臺)·포구락(抛毬樂)·향발(響鈸)·무고(舞鼓)·처용무(處容舞) 등 9종의 정재가 공연되고, 관현맹인(管絃盲人) 13인이 악기를 연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관복(冠服)·처용가면 제작에 관한 것이 실려 있다.
찬선색을 통해, 내자시(內資寺)에서 삼전(三殿: 대왕대비·왕·왕비)의 연상(宴牀)·좌협상(左挾牀)·우협상(右挾牀)·찬안상(饌案牀)과 양궁(兩宮: 왕세자와 빈궁)의 연상·면협상(面挾牀)을 마련했는데, 삼전의 상차림은 같은 행(行) 내에서는 음식의 높이가 같으며, 제1행이 가장 높고 제4행으로 갈수록 차츰차츰 낮아져서 상을 받는 사람의 자리에서 음식이 모두 잘 보이도록 진설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옹원(司饔院)에서 삼전과 양궁의 과반(果盤)과 미수(味數: 술을 올린 뒤에 차려내는 안주상) 등을 마련했고, 내섬시(內贍寺)에서 명부(命婦)의 선상(宣牀)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록으로 1611년 진풍정이 실려 있어 1630년 연향의식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1611년 진풍정을 준비할 때, 난리를 겪은 뒤 일체의 등록과 의궤가 모두 산실(散失)되어, 의주(儀註)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다. 대왕대비가 가장 높은 어른이니 대왕대비가 북쪽에 앉고, 왕이 그 다음 높은 자리인 동쪽에 앉아야 하는데, 옹주와 왕자부인과 같은 외명부(外命婦) 및 빈(嬪)과 같은 내명부(內命婦)는 가인(家人)의 예를 행하면 되니 문제될 것이 없으나, 문무백관의 아내인 외정명부(外庭命婦)는 신하의 의리가 있으니, 동향하여 왕을 대하는 것이 문제되었다. 여러 의논이 분분하다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모두 참석하고 왕과 왕비가 대왕대비에게 사배(四拜)하고 각각 동쪽과 서쪽에 앉으면, 세자 이하가 차례로 대왕대비에게 북향하여 사배하고, 동향하여 왕에게 사배하고, 서향하여 왕비에게 사배하는 것으로 정했다.
1630년 진풍정을 준비하면서 1611년에 해결하지 못한 사항이 논의되었다. 대왕대비가 주빈인 연향에서는 대왕대비가 북쪽에 앉고 왕은 동쪽에 앉으므로, 신하의 의리가 있는 외정명부가 왕과 함께 시연(侍宴)하면, 부득이 왕에게 서향(西向)하여 절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신하는 왕에게 북면(北面)해야 하는 예(禮)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왕과 외정명부가 같은 공간에 있지 않도록 서로 자리를 피했다. 즉, 왕과 왕세자가 행례하는 동안은 외정명부가 편차(便次)로 나가고, 외정명부가 행례하는 동안은 왕과 왕세자가 각각 소차(小次)와 편차로 나가서, 곤란한 점을 해결하였다. (김종수)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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